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탠리 볼드윈 (문단 편집) ==== 3차 내각(1935 ~ 1937) ==== 1935년 다시 총리에 취임한 볼드윈이 해결해야할 산적한 과제 중에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건은 재무장 문제와 유화책을 존속할것인가의 여부였다. 1935년 10월 볼드윈 총리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탄탄하게 하기 총선을 실시하였는데 뒷날 총리가 되어 [[뮌헨 협정]]을 체결한 대독 유화론자라 비난받았던 재무장관 [[네빌 체임벌린]]조차 볼드윈 총리에게 재무장을 노동당에 반대하는 선거 운동의 주요 쟁점으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볼드윈 총리는 재무장을 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볼드윈 총리는 유권자들에게 [[국제 연맹]]을 지원하고 영국의 방어를 현대화하며 결함을 개선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대규모 군비는 없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라고 말했고. 주요 공약으로 주택, 실업, 경제 불황 타파 등 그 당시 영국 국민들이 우선적으로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새웠다. 그래서 선거에서 [[보수당(영국)|보수당]]은 386석이라는 과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뒷날 볼드윈 총리의 작은 아들 A. 윈덤 볼드윈(A. Windham Baldwin)을 말과 당시 각료들의 말을 따르면 재무장 계획을 계획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쟁 자체에 혐오감을 느끼는 대중의 적대감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재무장 계획을 세워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드윈 총리를 당혹하게 한것은 독일의 [[히틀러]]가 아닌 바로 왕실과 새로 동극한 국왕 [[에드워드 8세]]였다. [[1936년]] 1월 20일 영연방에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큰 존경을 받으며 내각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국왕 [[조지 5세]]가 서거하였고 [[조지 5세]]의 큰 아들 [[에드워드 8세]]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에드워드 8세]]는 안정과 굳건한 책임감을 강조하던 부왕 [[조지 5세]]와는 달리 현재의 셀럽들처럼 자유분방하고 튀는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새왕의 사생활 문제와 유부녀들과의 바람 등으로 인하여 늘 내각과 의회에서는 그의 신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어지는 왕실 스캔들과 새왕이 독일과의 관계개선을 주장하며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사까지 보이자 볼드윈 총리는 뒷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것이 [[에드워드 8세]]와 [[월리스 심슨]]과의 연애였다. 왕은 심프슨과 결혼을 하겠다고 통보하였는데 심프슨은 두번이나 이혼한 이혼녀이자 미국인으로 평소 상류층의 모범과 책임감을 강조하던 볼드윈 총리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고 내각과 여당인 [[보수당(영국)|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영국)|노동당]]까지도 반대하였다. [[노동당(영국)|노동당]] 당수이자 훗날 총리가 되는 [[클레멘트 애틀리]]는 왕이 미국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으나 심프슨 같은 친독성향의 이혼녀가 새 왕비가 되는것에 강력히 반대한다라는 입장을 내각에 전달하였고 [[캔터베리 대주교]]와 각 지역의 성공회 주교들도 국교회의 수장인 국왕이 이혼녀와 결혼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결사 반대하였다. 게다가 영연방 각국의 총리들도 왕과 심프슨의 결혼해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왕을 지지하는 인물들과 세력들은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골수 왕당파 의원 40인과 보수왕당파 언론밖에 없었다. 볼드윈 총리로서는 왕과 심프슨에 대해 우려할만한 일이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심프슨이 독일의 나치 인사들과 긴밀하게 접촉을 하며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왕의 통해 국가기밀이 세어나갈 것을 우려한 볼드윈 총리와 내각은 왕에게 올리는 공식보고문에 국가기밀문서를 제외시키기에 이르렀다. 볼드윈 총리는 수차례 왕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계속된 의회와 국교회의 압력과 왕의 태도에 폭발한 볼드윈 총리는 [[1936년]] 12월에 왕으로서 의무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결혼과 왕위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하며 만약 왕좌와 결혼 모두를 선택할 시에 내각은 총사퇴를 할 수밖에 없고 헌법적인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왕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그러는 한편 왕의 어머니이자 왕실의 큰 어른인 [[테크의 메리|메리 왕대비]]와 왕위계승순위 1위인 왕의 동생 [[조지 6세|요크 공작]]에게도 이러한 내각의 뜻을 전하였다. 결국 1936년 12월 10일 [[에드워드 8세]]는 마지막까지도 왕으로의 의무를 지키길 바라는 내각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프슨과의 사랑을 선택하여 퇴위조서를 발표하였고 [[에드워드 8세]]에 이어 동생 [[조지 6세]]가 새로운 왕에 동극한다. 왕실의 문제를 깨끗하게 매듭짓고 강력한 블록경제정책과 동시에 금융개혁으로 1935년 말부터 경기가 크게 회복되기 시작함으로서 볼드윈 내각은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다. 볼드윈 총리는 [[조지 6세]]의 대관식을 치룬 1937년 5월 27일 고령의 나이로 인한 피로도로 인해 총리직 은퇴를 발표하였고 왕에게 사임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렇게 볼드윈은 시기적절한 때에 인기있는 총리로 국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났으며 그는 오랜 재임 공로로 제1대 뷰들리 [[백작]]에 봉해져 세습귀족이 된다. 그리고 그의 후임 총리는 [[네빌 체임벌린]]이 되었고 세계는 점차 2번째 세계대전을 향해 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